남학생 기숙사와 여학생 기숙사를 가르는 벽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빌은 양팔을 벽돌 위에 걸쳐둔 채로 건너편의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바람은 금목서 향을 몰고 왔다. 구름이 하늘을 가로지르고 붉은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왜 거기서 자고 있어?"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다만."
헥스가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늦여름의 공기가 기분 좋게 몸을 감싸안던 참이다.
"하지만 여자애들은 죄다 살롱에 갔다던데."
누군가 어느 귀부인의 호의를 샀다나. 1학년치고는 드문 일이라 들떠 하던 동급생들 얼굴이 선하다. 티파티에 입고 갈 드레스 같은 건 없다며 울상이던 애들도 있었고. 아무리 봐도 헥스 도데카가 후자는 아니다. 흐으음. 얼마 지나지 않아 빌은 헥스의 눈동자로부터 녹색을 읽어낸다.
"내가 보통의 여자아이로 보이는가?"
"……다르지도 않잖아."
특별히 더 숨겨둔 장치가 있는가 해서 소년이 조금 떨떠름하게 답했다. 새카만 눈이 상대를 훑는다. 머리카락은 꼭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붉은색이고, 눈은 꼭 그것과 대비되는 녹색. 교복의 칼라에 달린 카산드라 라이트가 태양 빛을 반사하여 반짝였다. 타고나기를 화려한 사람이다. 그 어떤 장신구 없이도 사람의 시선을 휙 잡아당기고 만다. 아무렴 귀에 난 구멍들은 반항적인 매력을 더하면 더했지, 그 반대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빌은 아주 쉽게 숙녀가 된 헥스를 상상한다. …그리고 금세 관두었다. 낮게 웃는 음성이 멀고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다.
빌은 헥스 도데카가 편입한 일상에 빠르게 적응했다. 담벼락에 기대어 골드혼 탐정 시리즈를 읽는 일에도, 그럴 때면 항상 건너편에서 누군가 트릭을 추리하는 통에 뜻하지 않게 당하는 스포일러에도, 학교 복도 어딘가에 있을 여자애 하나를 찾느라 온 오후를 보내는 일에도, 주말마다 광장 앞의 베이커리까지 행하는 에스코트에도. 계절이 지나는 동안 관찰하여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헥스가 운명적 반려를 찾는 일에 무심하다는 것이다. 의지가 박약한 것도 같다. 너는 왜 패밀리어가 아직도 없어, 넌지시 물으면 헥스는 영문 모를 답을 했다.
"차이를 두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다간 마녀로 살지 못할 거야."
"허어, 그게 걱정이거든 접어두어."
훗날 깨닫기를 그건 정말로 무용한 걱정이었으나 그때로서는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질투였을지도 모른다. 흔히 마녀들이 그러듯이 누군가 헥스에게 유일해진다면…… 그는 속절없이 외로워지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빌은 대답하는 대신 노을을 바라보았다.
해가 이 별과 비스듬하게 서면, 마지막까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붉은색이다. 박애란 그런 의미다. 그 무엇도 갈망하지 않은 채로, 헥스 도데카는 이 별의 멸망까지 사랑할 것처럼 굴었다.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감산하는 것은 우주뿐만이 아니고, 그리하여 인류는 투쟁하는 성질을 지니고야 만다. 그게 아니라면 달리 치미는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다. 남자는 꽤 보편적인 성질의 합리주의자였고 이성을 앞세우는 부류의 인간이었으나 지금만큼은 누구보다도 감정적으로 굴고 있었다.
냉전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침묵, 회피, 단절, 소강. 공백이 탑을 채우고도 시간은 흘렀다. 메이지는 고집스럽게 현상 유지를 택했고, 빌은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남자에게는 보고서를 전부 쓴 뒤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 취미가 있었는데, 자신이 헤드라인을 여덟 번쯤 다시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기를 관뒀다. 보통의 일상은 헥스 도데카와 함께하며 포기한 지 오래다.
정상적인 패밀리어라면 상대를 헤아릴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더 나은 단어를 선별했을지도 모르고, 좀 더 다정하고 살갑게 표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필드 위에서 목숨이라도 걸어 타협을 요구했을지도. 알 길이 요원하다. 다만 빌 어거스트 영은 헥스 로고스 도데카의 감시자, 친구, 연인, 가족……. 모든 것이었고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이윽고 시계탑의 그림자가 몇 번쯤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탑의 위층에서는 또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별의 멸망이 다가온다. / 한 줌 남은 이성이 도망치라고 외친다. / 하지만 어디로?) 빌은 다급하게 계단을 올랐다. 부서진 가구와 꽃병― 황금빛 금목서가 바닥을 구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사이에는 여자가 하나. 신이나 재앙이라는 말이 지독하게 잘 어울리는, 붉은색 머리카락의 여자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