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의 물음에 도혜는 아무렇지 않게 턱을 괴었다. 나직한 웃음기가 샌다.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그렇다면 무어가 문제지. 이어 토해지는 것은 어쩌면 작은 한숨이다. 무슨 지적이든, 짚어냄이든. 둘 중 하나를 하려고 해도 그녀는 뒤로 물러나는 것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 굴고 있었으니까. 새학기가 시작한 이래 당장의 이벤트라 하면 어쩔 수 없이 지날 일이다. 화이트 데이. 발렌타인 데이가 그나마 2월이라, 학교 내에서는 덜 성행했다면 그 이후에 오는 것은 크고 작은 이슈를 몰고 오기 마련이었다. 옆 반의 누군가는 고백을 한다 했고, 또 한 학년 아래의 누군가는 제 친구들에게 죄 우정 사탕을 돌렸다고 했다.
받고 싶다면 받고 싶다고 하면 그만. 주고 싶거든 주면 그만. 어느 쪽에도 거의 휩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는 뻔번하게 고개를 드민 채로 동아리 활동 시간 내내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다. 아직 서늘한 봄 날씨가 환기 차 열어 둔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커튼이 살랑거리더라도, 아직 조금은 눅눅한 하늘은 새파랗지 않고 어딘가 탁한 데가 있었다. 하얀 백열등 빛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기울이는 각도를 따라 그림자는 졌다. 기묘한 온도감이었다. 그리고 수빈은 도저히, 이 선배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었다.다음 달부터 발간될 학교 신문을 위해 굴러가던 샤프가 기어이 손에서 멎었다. 침묵을 깨는 건 결국 그의 몫이다.
“3학년이시잖아요.”
원색에 가까운 붉은 머리카락이 그 물음을 따라 흐트러진다. 도혜는 엄연히 의도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걸 숨기지 않는 것은 더욱 그러했고. 그러나 오랜 시간 보아온 ‘가도혜’라는 사람은 드러내는 것이 가장 작위적인 치였음을 그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그였기에. 수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깊이 한숨을 삼켰다.
“혹 내가 그것을 모를까.”
놀림과 진배 없는 대꾸임을 모를 수는 없다. 조심스럽게 물으려 해도 돕지 않는 선배란 참 까다로운 법이다. 안 바쁘신가 하고요. ……내가 바쁠 정도로 평범해 보이는지? 그 아주 잠시. 죽을 듯한 침묵이 차다가 사라진다. 가도혜. 그녀의 대답은 뻔뻔하다 못해 제법 의아하기까지 한 듯 해서. 결국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 행태였다. 그렇다면 이 비평범의 온상은 왜 이 자리에 있는가. 그는 잠시 골몰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마음을 읽을 수 없고, 드러내지 않은 무언가를 알아차리는 방법 같은 걸 가지고 있을 일은 없었다. 큰 직사각형 테이블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이 시선을 맞댄다. 수 초. 어떠한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침묵을 어색해라 하는 사람들은 아니라지만. 묘한 긴장감 따위는 어딘가 간질거렸다.
사각. 사각. 레이아웃을 잡고 세부적인 소재를 메모하는 손. 맞은편에 앉아 제 카메라 파일을 확인하던 도혜가 문득 시선을 달리 놓았다. 문 너머로 일었던 기척 탓이었다. 노크조차 채 되지 않았던 순간. 작은 개인 노트북 위를 두드리던 자그마한 자판 소리가 뚝, 멎는 것과 동시에 어딘가를 가느다랗게 바라보는 듯한 느슨한 움직임. 뭐가 지나가기라도 했느냐고, 수빈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딱, 하고.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났다. 자연히 시선이 이끌리거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맞은 편의 여자가 웃고 있었다. 다시금 문가로 고개를 돌린들 무엇이 있을리가 만무한 상황이라. 작게 한숨을 뱉은 그가 물었다. 왜 여기 계시는지는 슬슬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한가하셔도요. 책상을 가볍게 툭, 툭, 건드리는 손가락 끝이 일련한 박자처럼 늘어지다가…… 입이 열렸다.
“네가 무언가 받을까 싶어서 여기에 있어. 그러면 안 될까?”
“……. 네?”
“수빈이 네가 누구한테 무어라도 받을까 싶어서 내가 지키고 있다고. 안 되냐고 물었어.”
눈썹이 살짝 들리고, 도로 표정이 평소와 같이 정돈되지만 그뿐이었다. 무언가 주섬주섬 가방을 뒤적이는 소리가 뒤따르거든 도혜는 두 사람의 사이에 툭, 화려하게 포장된 몇 구 정도 되는 사탕과 초콜릿을 내려 놓았다. 또 어딘가 다른 방향을 보았다가도, 도로 시선을 맞대는 행위는 어딘가. 줌을 가깝게 당긴 렌즈와 빼닮은 곳조차 있을 지경이었다. 가도혜는 낮게 웃었다.